[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월 17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쪽샘 44호분 발굴조사 성과를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작한 8종의 삽화를 공개했습니다. 쪽샘 44호분은 1,550년 전 만들어진 신라 무덤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꾸미개(장신구) 등의 유물을 연구해 주인을 신라 공주로 추정하였지요. 당시 쪽샘 44호분에 붙인 사람의 머리모양을 추정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꾸미개, 바둑돌 860여 점, 철제바늘 30여 점, 화장이나 헌화의 용도로 활용되는 홍화(紅花) 꽃가루 등을 확인한 주요 성과를 지난해 7월 공개하면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이번에 공개한 삽화는 금동관을 쓰고 가슴걸이 등 꾸미개를 찬 모습과 말을 타거나 저승으로 향하는 모습, 바느질하거나 바둑을 두거나 화장하는 모습 등을 담은 모두 8종으로,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확인한 출토 유물들의 특징과 신라의 장례식 모습까지 담아 시각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했지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공주와 공주 무덤 삽화 제작ㆍ공개를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발굴조사와 고고학, 고대사(古代史) 등 전문 분야에 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국가유산을 활용한 문화사업 활성화에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천감리서 주사 조광희가 덕률풍으로 전해 오기를 영국군함 5척, 러시아군함 1척, 미국군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는데, 육지로 상륙하였던 영국 병사가 금일 아침 10시에 승선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외무아문일기》 1898년 1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덕률풍(德律風)’이란 전화기의 영어 말인 ‘텔레폰’을 한자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덕진풍(德眞風)’, ‘다리풍(爹釐風)’ 등과 어화통(語話筒), 전어통(전어통) 등으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에 보면 1895년 통신국의 사무를 전하면서 일본서 만든 말인 “전화(電話)”를 썼고, 이후 이 말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위 기록은 전화기를 처음 사용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이 가져온 것이라 하지요.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뒤인 1896년에야 덕수궁 안에 전화기가 설치됐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이월(음력)은 늦겨울이라 소한ㆍ대한 절기로다 눈 덮인 산봉우리 해 저문 빛이로다 새해 전에 남은 날이 얼마나 걸렸는가 집안 여인들은 새 옷을 장만하고 무명 명주 끊어 온갖 색깔 들여내니 짙은 빨강 보라 엷은 노랑 파랑 짙은 초록 옥색이라 한편으로 다듬으며 한편으로 지어내니 상자에도 가득하고 횃대에도 걸었도다 입을 것 그만하고 음식 장만 하오리라 떡쌀은 몇 말이며 술쌀은 몇 말인고 콩 갈아 두부하고 메밀쌀 만두 빚소 <농가월령가 (음력 12월, 양력 1월)> 오늘은 24절기의 마지막 날 대한(大寒)이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가장 추운 날이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한 무렵이 대한 때보다 훨씬 추울 때가 많다. 그러나 아직 이 무렵은 한겨울인지라 먹거리가 부족했던 옛사람들은 끼니 걱정이 컸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세끼 밥을 두 끼로 줄였다. 겨울철엔 나무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힘든 농사일은 없어서 세끼 밥 먹기가 죄스러워 점심 한 끼는 반드시 죽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죽을 쑤어 먹음으로써 아직 남아있는 양식을 아껴서 돌아오는 보릿고개를 잘 넘기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나라 건축물에는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을 썼는데, 흘림, 귀솟음, 안쏠림 따위가 그것입니다. 먼저 흘림을 보면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 것인데 민흘림과 배흘림이 있습니다. 민흘림은 기둥의 위쪽이 아래쪽보다 작게 마름된 기둥으로, 둥근기둥에 주로 사용하는데, 해인사 응진전, 화엄사 각황전 따위가 그 예지요. 배흘림기둥은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기둥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데,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래에서 3/1 지점이 다른 부분보다 볼록하게 배불러 있는 기둥입니다. 배흘림도 주로 원통형 기둥에 쓰는 것으로 이 배흘림 기법은 아래위를 같은 굵기로 기둥을 세웠을 때, 기둥의 중간 부분이 윗부분이나 아래보다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고 합니다. 배흘림 기법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써왔는데 부석사 말고도 무위사 극락전(無爲寺極樂殿), 화엄사 대웅전(華嚴寺大雄殿),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따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전통 건축물에서 이러한 착시 보정효과를 거두기 위해 적용된 기법으로 귀솟음과 안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가 있습니다. 《조선요리제법》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인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이 우리 음식 조리법을 집대성하여 쓴 근대식 조리법에 관한 책입니다. 1917년에 처음 펴낸 이 책은 1962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에 걸쳐 34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올리며 꾸준히 인기를 얻은 책입니다. 방신영은 음식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에게 16살 때부터 음식을 배우고 조리법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부터 출판을 위한 집필을 시작하여 1917년 《만가필비 조선요리제법(萬家必備 朝鮮料理製法)》이라는 책을 펴낸 것이지요. 초판에는 어머니께 배운 전통 음식을 바탕으로 조선 요리와 외국 요리 만드는 법을 수록했습니다. 책에는 요리용어의 해석, 중량비교, 음식저장법 등이 실려 있고, 식품저장의 원리와 남은 음식, 상한 음식의 처리, 해독에 관한 내용은 물론 분량이 적지만 외국요리도 소개되었지요. 이 책은 구전으로 이어지던 우리 음식의 제조법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요리서로 재료의 분량을 계량화하여 소개하는 등 과학적이고 능률적으로 우리 전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나 잡가를 일컫는 '서도소리'의 유지숙(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전승교육사, 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이 서도소리의 정수로 꼽히는 '관산융마ㆍ․수심가' 음반을 발매했다. 서도소리는 남도소리와 경기민요와 다른 음계를 사용하고 음을 떨면서 내는 가창 기법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어, 서도소리를 내려면 '대동강 물을 먹어보고 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부르기 어려운 소리로 꼽힌다. 서도소리의 정수를 담은 대표 악곡은 '관산융마'와 '수심가'로, '관산융마'는 모두 44구로 된 신광수(1713~1775)의 한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해 북쪽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를 창으로 부르는 유일한 서도시창으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 슬프고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한 노래 '수심가'는 서도소리의 섬세한 감정과 호흡을 담은 서도민요의 대표곡이다. 유지숙 명창은 '관산융마'와 '수심가'를 각각 1장의 음반에 담아 자신의 개인재산을 털어 모두 3년 동안의 제작 기간을 거쳐 이번 음반을 완성했다. 유 명창은 서도소리의 대표 악곡으로 꼽히는 두 곡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개울을 지나는데 월천꾼이 있어 가죽 바지를 입고 물속에 서서 삯을 받고 사람을 건네준다. 나를 업고 개울로 들어가다가 얼음에 발이 미끄러져 나를 업은 채 물에 주저앉아 버렸으니 비록 맹분(孟賁)의 용기와 제갈공명의 지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위 내용은 명에 가는 사신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박사호(朴思浩)가 쓴 《심전고(心田稿)》에 나오는 월천꾼 이야기입니다. ‘월천꾼(越川軍)’은 조선시대 삯을 받고 시내와 여울을 건너려는 사람을 업어서 건네주던 사람인데 건널 섭(涉), 물 수(水)를 써서 ‘섭수꾼(涉水軍)’이라고도 했습니다. 월천꾼은 평소에는 자기 일을 하다가 여름철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났을 때와 겨울철 얼음이 단단하게 얼기 직전 또는 얼음이 막 풀린 때 주로 일을 했지요. 《심전고》에 나오는 월천꾼 이야기를 보면 박사호를 업은 월천꾼이 미끄러져 물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박사호는 월천꾼의 목을 끌어안고 당황스러워하는데 같이 가던 사람들이 배꼽 빠지게 웃었다고 합니다. 월천꾼은 어깨까지 오는 가죽바지를 입기도 했지만, 미끄러워 주저앉아 버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부안 내소사 동종(來蘇寺 銅鍾)>은 보물이었다가 지난해 12월 26일 국보로 지정된 것으로 고려 후기 동종 가운데 가장 큰 종입니다. 또 내소사 동종은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이자 기준작으로 평가됩니다. 종을 만든 내력이 적힌 주종기(鑄鍾記)를 통해 도인(道人) 허백(虛白)과 종익(宗益)의 주관 아래 장인 한중서(韓冲敍)가 700근의 무게로 1222년(貞祐 10) 제작하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지요. 본래 청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850년(철종 1) 내소사로 옮겨졌는데, 이 내용을 적은 이안기(移安記)도 몸체에 오목새김(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내소사 동종은 공중을 비행하는 듯한 모습의 역동적인 용뉴(용 모양의 걸이), 종의 어깨 부분을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올림 연꽃) 무늬로 입체적으로 장식하고 몸체에 천인상(天人像) 대신 삼존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긴 점, 섬세한 꽃잎으로 표현된 4개의 당좌(撞座), 균형 잡힌 비례와 아름다운 곡률을 가진 몸체 등 뛰어난 장식성과 조형성을 지녀 고려 후기 동종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장인 한중서의 숙련된 기술력과 예술성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따뜻한 얼음 -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 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일주일 뒤면 24절기의 마지막 ‘대한(大寒)’으로 이때쯤이면 추위가 절정에 달했다. 아침에 세수하고 방에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당기면 손에 문고리가 짝 달라붙어 손이 찢어지는 듯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뿐만 아니다. 저녁에 구들장이 설설 끓을 정도로 아궁이에 불을 때 두었지만 새벽이면 구들장이 싸늘하게 식었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위 초상화(보물)는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두 손을 모은 조선시대 벼슬아치 허목(許穆, 1595~1682)입니다. 미수(眉叟) 허목은 눈썹이 길게 늘어져서 스스로 ‘미수’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벼슬은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당시 학계의 큰 어른이었고 정치인으로서는 남인의 영수(領袖)로서 깊이 추앙받았고, 평생 몸가짐이 고결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품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허목의 모습을 담은 이 초상화는 살아 있을 때 그려진 본을 바탕으로 옮겨 그린 이모본(移模本)입니다. 1794년(정조 18) 정조는 당시 영의정이던 채제공(蔡濟恭)에게 허목의 초상화 제작을 논의하도록 명합니다. 이에 체재공은 허목의 82살 때 그린 초상을 모셔다가 당대 으뜸 화가인 이명기(李命基, 1756~?)에게 옮겨 그리게 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배까지 그린 반신상인데, 그림 속 허목은 오사모(烏紗帽,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아치가 쓰던,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흉배가 없는 담홍색 옷을 입고 서대(犀帶: 무소뿔로 꾸민 정1품을 나타내는 띠)를 둘렀습니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